두 가지 에피소드- 육탄 10용사와 집단 월북

🦋< 두 가지 에피소드- 육탄 10용사와 집단 월북 >

ㅡ 1949년 5월 4일 

일본의 영향인지 또는 참말로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인지 우리 군에는 ‘육탄 돌격’의 신화가 많다. 그 효시라 할만한 것이 바로 육탄 10용사들의 돌격. 육탄 10용사의 신화는 6.25가 터지기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피어났다. “고지를 장악한 인민군들이 총탄을 퍼붓는 가운데 서부덕 상사 이하 10명의 대원들이 포탄을 안고 고지로 기어올랐고 벼락같은 포효와 함께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것이 신화의 골자다. 

그런데 좀 묘한 문제가 있다. 육탄 10용사의 소식이 대서특필되고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한 장례식까지 열렸으며 가신 님들 뜻 이어받아 괴뢰도당 물리치고…… 각오도 다졌는데 북한에서 서부덕 상사 등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식이 열린 것이다. 그들 중 최소한 몇 명은 살아 있었고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 오기도 했다고 한다. 육탄 10용사가 전원 폭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의 국방부도 인정하는 사실이긴 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우선 자폭에 실패하고 포로가 된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 거기서 “어서 죽여라!” 해서 폼 잡느니 북쪽 공화국에 귀순해서 귀순용사가 됐을 가능성이야 충분하다. 그런데 다른 얘기도 있다. 

당시 1사단 13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제주도에서 온건한 지휘관으로 해임됐던)의 증언을 듣자면 너무나 황망하여 실소가 나올 정도다. 그에 따르면 육탄 10용사의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송악산에서 격전중인 일선부대에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하여 공병소대장 박모로 하여금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박 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도중 적과 불의에 조우하게 되자 부하들을 수습지휘하지 못하고 혼자서 탈출하였다.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진채 모조리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단장은 박 소위를 총살하라고 노발대발했다. 

이때 박 소위와 친했던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이 거짓말을 한다. “사실은 대원 10명이 모조리 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자폭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보고를 들은 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육탄 10용사가 나왔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였던 것이다.”는 것이 김익렬의 증언의 골자. 물론 김익렬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고 김익렬의 주장을 진실로 오롯이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많다. 

하지만 육탄 10용사 전설에서 우리가 얻는 분명한 진실 하나. 6.25 전쟁 전에도 꽤 치열한 전투가 남북간에 오가고 있었다는 것. 

같은 날 동부전선에서는 또 하나의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진다. 오늘날 래프팅이 인기를 끄는 내린천은 한국 하천으로는 특이하게 남에서 북으로 흘러 소양강에 합류한다. 지금이야 한참 남쪽 땅이지만 당시의 내린천은 38선을 가로질러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었다. 일대를 지키는 6여단 8연대의 두 대대장은 매우 초조해 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군내 남로당 인맥에 대한 숙군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참모총장 이응준이 38선을 지키는 장교들을 함부로 조사할 수는 없다 거절하긴 했지만 그 이름도 끔찍한 김창룡이 이미 자신들을 조사하겠다고 설친 것도 알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육사 2기 동기생 한 명이 불어버린 명단으로 친했던 동료들이 끝장나는 것을 낱낱이 보고 있었다. 그 육사 2기생의 이름은 박정희였다. 

표무원과 강태무라는 이름의 두 대대장은 남로당원이었다는 설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설도있다. (해제된 소련 정보 문서에는 북한 첩보원이 대대장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들은 1949년 5월 4일 황당한 일을 벌인다. 1대대장 표무원은 대대 병력을 이끌고 대북 시위에 나서는 것처럼 38선을 넘고는 “포위됐으니 항복하자.”고 나선 것이다. 일부 병력이 반항하자 인민군에게 위협 사격까지 요청하여 겁을 준다. 그래도 수백명의 병사들은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꼼짝없이 또는 환희에 차서 인민군에 ‘귀순’하게 된다. 2대대장 강태무의 경우는 좀 더 처참했다. 많은 부대원들이 저항했고 위장 귀순해 있던 인민군이 중대장에게 투항을 설득하자 중대장이 이 인민군들을 사살해 버린 일도 있었다.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수백 명의 한국군이 북한으로 월북해 버린 사건은 완성된다. 그 가운데 좌익도 있었을 것이고 어영부영 묻어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한국군으로서는 영원한 흑역사를 기록한 셈이다. 

강태무는 공격(?)에 나서기 전 따라 나서겠다고 자청하는 한 장교에게 “너는 여기에 남아라.”고 지시한다. 그 장교의 이름은 정승화. 후일 12.12 때 전두환에게 곤욕을 치르는 참모총장 정승화는 아차 하면 북으로 끌려갈 뻔 했다. 이 사건 이후 숙군 작업은 더욱 더 치열하고 혹독하게 전개된다. 약 5천여 명의 좌익 혐의자가 사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최소한 군문에서 쫓겨난다. 김일성은 6.25가 터진 후 강태무의 가족을 특별히 찾아 북송하고 인민군이 된 국군들을 자신들의 주둔지로 보내 가족들을 챙기게 하는 등 이 월북의 주인공들을 후대하지만 6.25 때 박헌영이 기대했던 남한 내부의 동조자들을 싹쓸이했던 가장 큰 계기 중 하나는 바로 표무원과 강태무의 월북이었다. 

이 일로 백전노장 이응준 참모총장이 물러나게 되는데 그 뒤를 이은 것이 전쟁 초기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 준 채병덕이다. 또 황망한 월북 사건 후 국군은 복수 계획을 세운다. 방법은 월북 사태의 역이용. 또 한 부대가 월북하겠다는 거짓 전갈을 인민군에게 보낸 후 매복을 통해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매복 부대가 길을 잘못 들어 인민군과 충돌하면서 산통이 거의 깨졌는데 막판에 한 부대가 인민군 추격대를 격멸하는 공을 세우게 된다. 이걸 사직리 전투라고 부른다. 육탄 10용사의 송악산 전투나 사직리 전투 등에서 승리한 국군은 인민군을 묘하게 얕잡아보게 되고 이 근거없는 오만 또한 6.25 초전의 실패를 부르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표무원과 강태무는 둘 다 인민군에 복무하며 전쟁을 치루고 살아남는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 빅뱅의 탑과 권상우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민군 766부대의 지휘관이 강태무였다. 둘은 천수를 누리며 인민군 장성으로 종생했으며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는 조선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는 최상의 영광을 누리다가 죽었다. 둘 다 경상도 사람이었던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했을까. 하여간 그들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가느다란 물줄기들을 꽤 여러 개 돌려 놨던 사람들이었다. 

이 흑역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진실 하나. 남한 내 좌익 세력은 거의 붕괴 상태에 있었다. 박헌영이 북으로 탈출할 때와 상황은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박헌영은 자신의 남로당 조직이 건재하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더 조직이 약화되기 전에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도 그에 결국 동조했다. 전쟁을 불러오는 건 대개 조국을 지키려는 숭고한 마음이 아니라 “이길 수 있다.”는 필승의 신념이다. 우리도 몇년 전에 듣지 않았던가. “(전쟁발발 후) 3일만 참으면 된다.” 던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황망한 박력을.

ㅡ From 후배 김형민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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