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의 노래를 들으며

🦋 < 양희은의 노래를 들으며 >

히든 싱어 양희은 편을 보다가 때아닌 감회에 젖는다. 방송 중에 그가 말한 대로 노래는 가수의 것이기도 하지만 듣는 사람들의 노래가 된다. 수련회 갔다가 익사한 친구를 추모한 김민기의 노래 <친구>가 다른 차원의 노래가 되고 제대하는 늙은 하사관의 푸념을 담은 <늙은 군인의 노래>가 늙은 투사, 노동자, 농민으로 바뀌어 불리웠듯이 말이다. 히든싱어 양희은 편의 첫 노래였던 <아침이슬>도 역시 그랬고 노동자들의 합동 결혼식 때 김민기가 주례 대신 만들어 불렀던 결혼 축가 <상록수> 역시 태어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팔자의 노래가 되지 않았던가.

노래는 별로 잘 하지도 못하면서 염치불구 실력불구 노래패 문을 두드린 건 <상록수>의 사연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운동권 같은 건 상상도 못하고 뭔가 뜻이 있고 사연이 있는 노래를 부르는 데가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양희은의 청아한 목소리가 잉잉거렸고 입학 전 내내 양희은의 노래들을 듣고 있었다. <작은 연못>이나 <금관의 예수> 그리고 <아침이슬> 등을 ‘길보드 차트’라 부르던 리어카에서 산 ‘금지곡 모음’을 통해 접했으니까. 그렇게 보면 양희은도 내 삶에 조금의 영향을 미친 셈이다.

나이 젊어서나 늙어서나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참 부러워진다. 달포 전 뒷풀이 자리에서 합창을 하는데 선배한테 “네가 옆에 있으면 노래 부르기 싫어져.” 하는 타박을 들은 뒤엔 더욱 노래 공포증이 생겨 웬만하면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여는 게 싫어진 탓도 있겠지만, 오늘 그녀의 노래를 들으니 새삼 부럽고 부러우니 또 부럽지 아니한가 말이다. 그녀의 의도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이미 역사가 된 노래들을 그 목청으로 불렀다는 점에서 이미 양희은은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하겠다. 그 역사의 한 조각 가져와 본다.

80년대 초의 어느날, 성북서에서 나온 짭새들이 학내에서 학생들과 족구를 하던 시절,어느 학교에서는 꽤 큰 규모의 학내시위가 일어났다. 민주광장이라고 불리던 학생회관 앞 너른 터 한 귀퉁이에서 갑자기 유인물이 눈송이 날리듯 떨어지기 시작했고 몇 명의 주동자가 구호를 외치며 뛰어나왔다.

시위가 벌어지자마자 짭새들은 가차없는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시간을 끄는 것이 시위의 으뜸 목표였던 때라 주동자들은 이곳 저곳에서 게릴라식으로 출몰하며 전경들의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오래지 않아 짭새들은 대세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수십 명의 시위대는 사방에서 죄어 들어오는 전경들에게 포위된채 민주광장 중앙에 몰렸고 짭새들은 그 주위를 빙 둘러싼채 최루탄을 쏴 갈기며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끌고가기 시작했다. 완전무결한 진압작전이었다.

그때 마침 수업이 끝나서 민주광장 근처에는 수업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이 운집해 있었다. 교양관에서 교양과목을 수강하는 1학년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불안한, 그러나 돋아나기 시작하는 분노의 눈초리로 민주광장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진압을 몸서리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학생들 사이에서 맑은 노래 한 자락이 흘러나왔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아침이슬 레코드 판 하나가 당시 물가로 2만원씩 했다는 시절, 그러나 알음알음으로 두려움 속에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을 익혔다는 시절, 교문 앞에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다가 그대로 연행되어 강제징집을 당했다는 시절, 갑자기 튀어나온 아침이슬의 주인공은 신방과 ( 정외과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었음) 1학년 여학생이었다.

‘울음이 잔뜩 배어 있었지만 투명하기 이를데 없었던’ 아침이슬 한 소절이 끝나면서 노래는 점차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때….” 홍보관 앞에서 시작한 노래는 교양관으로 번졌고 학생회관 앞에서는 거대한 대합창으로 변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그때 민주광장 중앙에서 두들겨 맞고 있던 학생 중 하나는 그렇게 회고했다. 그 가사를 들은 순간 자신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고 한다. 태양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고 그 태양 아래 우두커니 서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던 대학 건물들이 하나의 거대한 공동묘지로 보였다고 했다. 대학 내에서 경찰이라는 이름의 깡패집단에게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으며 고개 숙이며 끌려가는 그 어두운 시간은 차라리 무덤 속의 공포와 같았지만 주위에서 학우들이 불러 주는 아침이슬은 그야말로 ‘천사들의 부활의 합창’이었다는 것이다.

끌려가던 학생들도 퉁퉁 부어버린 입술을 벌려 노래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 노래 부르는 학생들의 옆구리에 인정사정없는 2단 옆차기가 들어갔지만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들의 목청을 막았으면 막았지 그 발길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노래는 더 이상 노래가 아니었다. 이제 끌려가던 학생들은 모두 허리를 폈다. 연행대열로 앞사람 어깨에 걸쳐져 있던 손에 손에 힘이 갔고 고개를 빳빳이 쳐 든 채 노래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경찰들도 이 거대한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학생들의 집단행동 (그때에야 학교에서 아침이슬 합창하면 집시법 위반이었을 테니까)을 제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채 학교에서 철수하려 했지만 아침이슬이 끝나자 학생들은 노도와 같이 몰려나왔다.
“학원침탈 자행하는 전두환 정권 타도하자. ”

그날은 실로 몇 년만에 보는 대중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조직적이지도 않았고 주동도 없었지만 학생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고 해당 경찰서는 그날 이른바 “아침이슬 시위”로 상부에 보고한 학내 소요 사태를 진압하는데 십년감수 정도의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른바 ‘아침이슬 시위’였다.

내가 중딩쯤 됐을 때 천리 떨어진 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니 경험하지도, 지켜보지도 못한 일이고, 그 무용담(?)을 늘어놓자는 뜻은 전혀 아니다.

어차피 이제는 어른들의 6.25 타령 비슷한 수준으로 치부되고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는 80년대 이야기를 굳이 길어올리는 이유는 언젠가 행여 양희은씨를 만나게 되면 이 얘기를 해 드리고 싶어서다. 좀 얕은 기억 바닥에 쟁여 두기 위해서다. 그녀의 노래를 들었던 사람들, 자신의 노래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그 노래 가락 아래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벌떠벌이든 조근조근이든 얘기해 드리고 싶어서다.

세상은 바뀌었다. 그러나 그 속의 삶들이 다 바뀐 것은 아니다. <상록수>와 <아침이슬> <늙은 군인의 노래>의 음색이 바뀔망정 오늘날에도 불릴 수 있는 까닭일 것이다. 또 다른 노래들이 나와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어깨를 다독이고 다리에 힘을 불어넣고 주먹을 부르쥐게 만들겠지. 하지만 아직까지는 양희은의 노래만큼 울림이 크고 여운이 오래가는 노래는 만나지 못했다. (개인적인 느낌일 뿐임을 밝혀 둠)

오늘 밤 꿈에서도 아마 저 노래 가락들이 아롱질 것 같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 노래들의 자장 아래 있었다. 억수로 많은 이들의 삶이 저 노래 가락들 속에 물결쳤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ㅡ From 후배 김형민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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